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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가족이야기 2012. 5. 8. 14:26

     


    둘째가 생겼다. 

    예정일은 2012년 8월 17일.

    25주 5일이 지났고, 14주 2일, 그러니까 오늘 (5월 8일)자로 딱 100일 남았다. 


    93학번인 내 아내의 나이는 우리 나이로 39살, 한마디로 노산이다. 

    첫째 준이가 초등학교 2학년, 9살이니 이 녀석과는 8살 터울이다.

    이 녀석이 30살에 장가를 간다해도 (얼마전 아들이라고 의사가 이야기해주더라. 준이 때만해도 태어나서 알았는데, 요즘은 알려주나 보다) 엄마 나이가 69살에 장가를 가는 셈이다. 또, 준이가 대학을 갈때 얘는 아직 초등학생이 되는거다. 

    그래서 걱정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솔직히 너무 기분이 좋다. 


    내가 결혼한 것은 2003년 5월 4일, 올해가 9주년이 되는해이다.

    나는 2002년 한일 월드컵때 결혼 약속을 하였고, 2003년에 결혼을 하였다. 

    내년 10주년에는 두 아이와 함께 할 것이라 생각하니, 다시 미소가 지어진다. 

    그간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한때는 악몽이었던 것들이 이젠 모두 추억이 될 수 있겠지..


    네 번의 유산, 준이 한명 만으로 만족하려고 했다.

    여러 번 되풀이 된 유산으로 산모의 건강을 생각했을때 둘째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반복된 유산으로 집안 어르신들에게 걱정을 끼칠 수 밖에 없기에, 임신을 했어도 그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않았으나, 이제는 안정기에 접어들기도 했고, 주변에 양해를 구하는 등 신세를 져야할 것들이 워낙 많이 있기에, 공개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또,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고, 아내가 많이 고생을 했기에, 이러한 기록을 남겨 아이들에게 전달해주고하는 생각도 좀 있다. 따라서 이 글은 기존 내 블로그에 남긴 "남들을 위한 글"이라기 보다는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한 글"이다. 따라서, 읽는이에 대한 배려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으니, 그점은 양해해주기 바란다.


    첫째. 준이의 임신 그리고 출산.

    결혼하고 한달이 지났을까, 우리는 임신 사실을 알게되었고, 집에서 제일 가까운 산부인과인 분당 차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의례적인 검사 중의 하나인 기형아 테스트 "트리플 테스트"를 받았고, 그 결과 "다운증후군 고위험군" 이라는 결과를 들었다. 당시 선생님은 아주 드라이한 말투로, 양수 검사를 해보면 확진할 수 있고, 양수 검사를 하면 1/200의 확률로 아이를 잃을 수 있다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내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진료 기록 사본을 챙겨, 다른 병원을 알아보기로 했다. 

    놀라기도 했고,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태도에서, 매우 분노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행히 근처에는 분당 서울대 병원이 있었고, 의사와의 상담 결과, 별 문제가 아닐 것 같지만, 산모의 정신 건강을 위해 양수 검사를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양수 검사 결과 정상. 2004년 2월 25일 오전 11시 25분, 3.9kg의 아기 준이는 자연분만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두번째 임신, 그리고 유산.

    준이를 낳고 이듬해인 2005년 우리는 다시 아기가 생겼다. 첫째를 순산해서 일까? 자궁 출혈이 조금씩 계속되고 있었으나, 그래도 별일 없을거야 하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쿼드 테스트"에서 신경관 결손 고위험군이 나왔음에도, 양수 검사를 받지 않고 버텼다. 그러다 얼마 후, 그러니깐 6개월에서 7개월 사이 정도 시점에, 제대탈출로 유산되었다. 안정을 위해, 대부분의 사람은 알만한 그 직장에서 팀장 직책과 스톡옵션을 모두 포기하고 그만둔지 불과 한달 정도 뒤의 일이다. 


    세번째 임신, 그리고 유산.

    두해 뒤인 2007년, 또 다시 아기가 생겼고, 이번엔 정말 조심해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휴일 진료가 가능한 집 (당시 건대 근처의 처가에 살고 있었다) 에서 가까운 병원을 택했다. 그러던 중, 양수가 새는 듯한 느낌을 받아 병원을 방문하였으나, 그곳에서 큰 병원으로 옮기라 하여, 아산병원 응급실로 직행, 입원하였다. 다행히 검사 결과 큰 이상은 없어, 다음날 정밀 검사를 하기로 하였으나, 새벽에 양막 파열로, 양수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임신 5개월째 치료적 유산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후, 와이프는 프리랜서 조차 그만두고, 건강 회복과 육아에 전념하게 된다.


    네번째 임신, 그리고 유산.

    2008년 늦은 봄, 다시 아기가 생겼으나, 3개월에 접어들면서 계류유산이 되었다. 이때부터 둘째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포기했었다. 더 이상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에..


    다섯번째 임신, 그리고 유산.

    2010년 초, 다시 아기가 생겼다. 그것도 쌍동이. 범띠 마누라가 범띠해에 쌍동이를 갖은 것은 그간의 슬픔을 한번에 날리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말에 쌍동이를 낳는다면 그간의 슬픔이 다 사라질듯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생길 수 밖에 없는게, 한명도 버티기 힘든데 두명이라면 과연? 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 병원 방문했을때, 쌍태아 중 한명이 자연 유산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 다음 병원 방문했을때 다른 한명 마저 유산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늘도 참.. 무심하다 생각했다. 


    여섯번째 임신, 그리고 희망!

    2011년 말, 다시 아기가 생기자. 우리는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또 잘못될까하는 생각에, 나는 와이프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원래 주말에는 딴데 안가고 집에 있는 편이었지만, 이때부터는 주말에는 거의 100% 집을 지켰고, 설겆이 빨래 청소에 요리까지 전부 내가 하기 시작했다. (뭐 100% 는 아니다. 10% 미만에서 50% 초과로 올라간 정도랄까?) 

    그리고 설, 제사 등 각종 집안 행사에 가지 않고 집에서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 그러던 차에 3개월이 지났고, 이때 부모님들은 아시게 되었고, 많은 분들의 염원과 도움으로 이제 7개월에 접어 들었다. 

    이제 인큐베이터에 들어간다고 해도, 생존 확률은 많이 높다고 한다. 결국, 이 녀석은 늦은 여름 세상을 볼 것이다.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살다보면 힘든 것도 있고, 서럽거나 억울할 것도 있다. 또, 여러가지 우선순위를 결정해야할 일도 있다. 요즘은 도를 닦는 심정으로 참고 이해하려고 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내 가족, 내 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판단에서 기인한 나의 선택이다. 이러한 나의 선택을 방해하는 요인들이 존재한다면, 나는 그것들을 과감하게 제거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마누라가 직장을 포기하고 아이를 택하면서 나에게 해주었던 명언, "미래의 불확실한 후회 때문에, 현재의 확실한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 이제는 내가 그것을 실천할 때이다.


    자, 이제 남은 100일 확실하게 달리자! 파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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